Korea Discount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재벌 지배구조, 낮은 배당, 정책 불확실성 같은 ‘상단의 문제’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런데 시장의 밸류에이션을 장기적으로 바꾸는 힘은 의외로 아래에서 올라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국민의 노후자금, 즉 퇴직연금·연금저축 같은 장기 자금이 주식시장에 얼마나 “꾸준히, 오래” 머무르느냐입니다. 미국의 401(k)처럼 은퇴자금이 자연스럽게 주식·채권 인덱스로 흘러들어가면, 시장에는 상시 매수 기반이 생기고 변동성이 완화되며, 기업도 주주환원과 지배구조 개선을 무시하기 어려워집니다. 반대로 노후자금이 예금·보험 위주로 묶여 있거나, 주식 비중이 극히 낮다면 한국 주식시장은 외국인 수급과 단기 자금에 더 흔들리고, “국민도 장기적으로 안 사는 시장”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되면서 디스카운트가 유지되기 쉽습니다. 이 글에서는 퇴직연금이 왜 Korea Discount를 줄일 수 있는 핵심 열쇠인지, 한국 현실에서 무엇이 막히고 있는지, 그리고 정책·기업·개인 차원에서 어떤 선택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까지 정리해 봅니다.

서론: ‘국민의 노후자금’이 주식시장에 없으면, 시장은 늘 얇고 흔들린다
주식시장의 밸류에이션은 결국 “누가 어떤 돈으로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의 싸움입니다. 여기서 ‘누구’는 단순히 개인·기관·외국인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 자금의 성격을 말합니다. 오늘 들어와서 내일 나갈 수 있는 돈이 시장을 지배하면, 시장은 늘 얇아지고, 가격은 ‘기대’보다 ‘수급’에 더 민감하게 흔들립니다. 반대로 월급에서 자동으로 적립되고, 10년·20년 단위로 운용되며, 은퇴 시점까지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 돈이 시장에 깔리면, 시장은 훨씬 두꺼워지고, 기업의 실적과 배당·자본효율 같은 본질 요소가 가격에 더 잘 반영됩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에서 주식시장과 연금제도는 따로 떨어진 제도가 아니라, 서로를 떠받치는 한 몸처럼 움직입니다.
한국의 현실을 떠올려보면, 이 연결고리가 생각보다 약합니다. 퇴직연금이 제도적으로 존재하고 규모도 커지고 있지만, 개인이 체감하기에는 여전히 “노후자금은 안전하게 예금처럼”이라는 관성이 강합니다. 회사에서 DB(확정급여)형으로 운용하든, DC(확정기여)형으로 개인이 선택하든, 실제로 주식·주식형 펀드·주식 인덱스 ETF 비중이 충분히 높아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주식시장은 ‘국민의 노후자금이 깔린 시장’이라기보다, ‘외국인과 단기 개인이 기분 따라 들어왔다 나가는 시장’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이 이미지 자체가 Korea Discount의 한 축이 됩니다. “시장 전체가 장기적으로 주주가치를 중시하는 구조가 아니니, 더 싸게 사야 한다”는 요구가 자연스럽게 붙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퇴직연금이 단순히 개인의 노후를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퇴직연금이 주식시장으로 들어오는 방식이 바뀌면, 시장의 수급 구조가 바뀌고, 기업의 행동이 바뀌고, 결과적으로 밸류에이션이 바뀔 수 있습니다. 즉, 퇴직연금의 ‘운용 문화’는 장기적으로 Korea Discount를 줄이거나, 반대로 고착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퇴직연금을 “개인 금융상품”이 아니라 “한국 자본시장 체질을 바꾸는 장기 엔진”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본론: 퇴직연금이 Korea Discount를 줄이는 4가지 메커니즘과 한국의 병목
1) 상시 유입되는 장기 자금이 ‘바닥’을 만든다
Korea Discount가 심해지는 구간을 떠올려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원화 약세·금리 불안·정책 혼선이 겹치면서 외국인이 매도할 때, 국내에서도 공포가 번져 개인이 던지고, 지수는 수급 공백 속에서 과하게 빠지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이때 “누가 바닥에서 받아주느냐”가 시장 체질을 결정합니다. 퇴직연금 같은 장기 자금이 일정 비율로 주식 인덱스를 자동 적립하고 있다면, 하락 구간에서 매수 단가가 낮아지는 ‘역설적 안정장치’가 됩니다. 시장에는 늘 “살 사람”이 존재하게 되고, 그 사실만으로도 변동성은 줄어듭니다. 변동성이 줄어들면 투자자는 더 낮은 리스크 프리미엄을 요구하게 되고, 이는 밸류에이션(디스카운트)의 축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 메커니즘이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습니다. 연금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꾸준히 들어오는 구조가 만들어졌다고 말하기에는, 운용 선택이 지나치게 보수적이거나, 단기 성과·원금 보전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시장은 여전히 “위기 때는 받쳐줄 돈이 적은 시장”으로 남고, 이는 Korea Discount의 토양이 됩니다.
2) 연금·기관의 ‘주인 역할’이 커질수록 지배구조 할인은 줄어든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원인 중 하나는 지배구조와 주주환원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법만 고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기업이 실제로 바뀌려면 “대주주가 싫어하더라도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주주”가 늘어나야 합니다. 퇴직연금 자금이 커지고, 그 돈이 국내 기업 주식을 장기 보유하게 되면, 연금·기관은 자연스럽게 의결권 행사와 주주 대화를 강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업이 망가지면 결국 가입자(국민)의 노후가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지배구조는 ‘기업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자산의 문제’로 바뀝니다. 시장은 이런 구조를 신뢰합니다. 신뢰가 올라가면 디스카운트는 줄어듭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기관의 스튜어드십이 “문서로는 존재하지만 행동이 약하다”는 비판을 종종 받습니다. 의결권을 행사하더라도 일관된 기준이 충분히 체감되지 않거나, 논란이 생길 때만 반짝 강해지는 인상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퇴직연금이 Korea Discount를 줄이려면, 연금·기관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시장의 기준선을 만들어야 합니다. 기업이 배당을 늘리고 자사주를 소각하며 자본배분 계획을 내놓을 때, 그 행동을 평가하고 자본을 더 배분해 주는 식의 선순환이 필요합니다.
3) 배당·자사주·자본효율성 개선을 ‘시장 표준’으로 만든다
연금 자금이 주식시장에 오래 머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노후 현금흐름”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배당과 자사주 소각은 단순한 주주환원이 아니라, 연금 자금의 운용 논리를 강화하는 핵심 도구입니다. 기업이 안정적으로 배당을 늘리고, 자사주를 소각하며, ROE를 개선하면, 연금은 그 기업을 더 오래 들고 갈 수 있고, 더 큰 비중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배당이 박하고 현금을 쌓아두기만 하면, 연금 입장에서는 굳이 그 기업을 오래 보유할 이유가 약해집니다. 이렇게 연금의 투자 기준이 시장 전체로 확산되면, 기업들도 “이제는 배당·소각·자본효율을 못하면 장기 자금이 안 온다”는 학습을 하게 되고, 이는 디스카운트 축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한국의 병목은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연금 자금이 배당·자본효율을 기준으로 기업을 선별하는 문화가 충분히 강하지 않으면, 기업 입장에서는 변화의 동기가 약해집니다. “배당을 늘려도 주가가 반응이 없고, 시장은 여전히 단기 테마에만 움직인다”는 학습이 남으면, 기업은 밸류업보다 단기 이슈 대응에 더 매달리게 됩니다. 결국 퇴직연금이 시장에 들어오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그냥 돈의 규모가 커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돈이 어떤 기준으로 기업을 평가하고, 어떤 행동에 보상을 주는지가 핵심입니다.
4) 개인에게도 이익: ‘자동 적립’은 투자 문화를 바꾸는 가장 현실적인 장치
Korea Discount를 줄이는 데 개인 투자자의 투자문화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모든 개인이 갑자기 장기 투자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바쁘고, 피곤하고, 시장은 시끄럽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장 현실적인 변화는 ‘의지’가 아니라 ‘시스템’에서 시작됩니다. 퇴직연금·연금저축의 자동 적립은 개인을 억지로 성인군자로 만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장기 투자자로 훈련시키는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매달 일정 금액이 인덱스 ETF로 들어가고, 시장이 빠질 때도 멈추지 않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개인의 투자 호흡은 길어지고, 시장의 단기 과열·과매도는 완만해집니다. 이 변화가 누적되면, 시장은 “단기 투기장”에서 “노후 자본이 버티는 장”으로 조금씩 옮겨갈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퇴직연금은 단순히 ‘돈의 크기’가 아니라 ‘돈의 성격’을 바꾸는 도구입니다. 한국이 Korea Discount를 줄이고 싶다면, 퇴직연금을 통해 장기 자본의 바닥을 만들고, 연금·기관의 주인 역할을 강화하며, 배당·자본효율을 시장 표준으로 만들고, 개인 투자자의 호흡을 자동으로 길게 만드는 방향으로 설계를 고도화해야 합니다.
결론: Korea Discount 해소는 ‘정책 구호’보다 ‘노후자금의 흐름’이 먼저 바꾼다
Korea Discount는 거대한 구조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 구조를 실제로 바꾸는 힘은 의외로 일상적인 곳에서 나옵니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 그중 일부가 자동으로 적립되는 퇴직연금, 그리고 그 연금이 어떤 자산에 투자되는지의 선택 말입니다. 노후자금이 예금과 단기 안전자산에만 머무르면, 한국 주식시장은 계속 얇고 흔들리는 시장으로 남기 쉽습니다. 반대로 노후자금이 장기 인덱스와 우량 기업에 꾸준히 쌓이면, 시장에는 상시 유입 기반이 생기고 변동성이 줄며, 기업은 주주환원과 지배구조를 무시하기 어려워집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늘 싸다”는 상수처럼 보이던 디스카운트는 조금씩 줄어들 가능성이 생깁니다.
물론 이 변화는 단기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일본의 사례만 봐도, 디스카운트를 줄이기 위한 제도와 시장의 학습에는 최소 10년 단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퇴직연금이 중요한 겁니다. 퇴직연금은 “10년 단위의 시간”을 원래부터 전제로 하는 돈이기 때문입니다. 이 돈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면, 코리아 밸류업 정책이 흔들리더라도 시장의 체질은 꾸준히 바뀔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책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노후자금이 시장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면 디스카운트는 쉽게 줄어들지 않습니다.
개인 투자자 입장에서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합니다. 첫째, 퇴직연금·연금저축·IRP를 “세금 혜택 상품” 정도로만 보지 말고, 내 투자 호흡을 길게 만드는 핵심 엔진으로 바라보기. 둘째, 이 계좌 안에서는 단기 테마를 줄이고, 한국/해외 인덱스 ETF와 배당·가치 성격의 자산을 코어로 두어 자동 적립 구조를 만들기. 셋째, 한국 비중을 가져가더라도 “디스카운트가 오래 갈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글로벌 자산과 함께 가져가는 바벨형 구조로 리스크를 관리하기. 이런 선택들은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월급쟁이에게 가능한 가장 현실적인 변화입니다.
결국 Korea Discount를 줄이는 길은, 누군가의 선언문보다 ‘돈의 습관’을 바꾸는 데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습관을 가장 강력하게 바꿀 수 있는 장치가 퇴직연금입니다. 시장을 바꾸는 건 늘 대단한 이벤트가 아니라, 꾸준히 쌓이는 자본의 방향입니다. 오늘 내 퇴직연금의 흐름을 한 번 점검해 보는 것—그 작은 행동이 한국 자본시장의 디스카운트를 줄이는 아주 긴 이야기의 첫 장이 될 수 있습니다.